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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wish Journal

북한 내 대학살 Holocaust in North Korea (translation)

by Jared Sichel

January 22, 2014 | 10:57 am

북한 내 1997년 기근 동안 고아원에서 사진 찍힌 아이들. 이 사진은 Trócaire의 전 감독,  Justin Kilcullen에 의해 찍힌 사진 입니다. www.trocaire.org

북한 내 1997년 기근 동안 고아원에서 사진 찍힌 아이들. 이 사진은 Trócaire의 전 감독, Justin Kilcullen에 의해 찍힌 사진 입니다. www.trocaire.org

신동혁이 그의 친구, 23살의 북한 사람의 죽은 시체를 기어 올랐을 때, 그는 그를 관통한 전기 총격의 전류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운이 좋게도, 신씨는 그가 입고 있던 바지로 그의 친구의 시체를 연결 시켜, 가시 철사 울타리를 통한 치명적인 전압의 흐름의 대부분으로부터 그를 보호할 수 있었습니다.

이 울타리는 그가 수용소, 수도 평양시로부터 북쪽으로 약  50마일 떨어진 언덕에 있는 태동강에 있는 북한 수용소 내에서 태어났을 때부터 그를  억류한 울타리었습니다.

그러나 가혹한 오후, 2005년 1월 2일, 전에는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무언가가 수용소에 일어 났습니다— 누군가가 탈출했습니다.

신씨의 친구, 박영철은 울타리에 먼저 도착했고, 그의 상체를 전기가 통하고 있는 가장 낮은 두 가닥의 전선을 통해 밀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전류는 너무 강력해서 박씨를 몇 초 만에 울타리에 붙게하여 죽였습니다. 

언론가Blaine Harden이 “14 수용소로부터의 탈출”에서,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의 신씨의 삶에 대한 사로잡는 설명과 함께 적었습니다. “그[박씨]의 무게가 눈에 덮힌 땅에 반하여 돌았고 이는 울타리에 작은 간격을 만들며 바닥의 전선을 허물었습니다.”

신씨는 그 간격 사이로 기었지만 그의 두 다리가 와이어에 노출되어 그의 피부가 타고난 후 였습니다. 끔찍한 고통 속에서, 그는 처음으로 수용소에서북한 감옥 수용소에서 태어나고 그의 인생 내내 그 곳에서 살고, 그 후 탈출한 첫 번째 사람이 되어, 14 수용소에서 멀어져 산 쪽으로 내리 달렸습니다.

저녁이 되고, 몇 마일의 여정 후에, 그는 건조한 옥수수 몇 자루와 몇몇의 천으로 된 신발 그리고 그의 죄수복을 가리고 원치 않는 주의를 피할 수 있게 하는 낡은 군복을 발견했습니다.

신씨는 돈이 없었지만 자유를 위해 중국 국경선을 향해 북쪽으로 370마일을 가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는 경찰과 맞딱뜨리지 않게 경계하였으나, 그는 역시 마르고 굶주렸습니다.

그는 완벽하나 북한 사람이었습니다.


최근 늦은 11월의 오후, 신씨는 인터뷰를 위해 워싱턴 D.C.에 위치한 미국 대학살 추모 박물관(USHMM)에 그 자신의 억류를 회상하고 제2차 세계대전 강제 수용소로부터의 이야기들을 비교하며 앉았습니다. 현재 31살의 신씨는 제 맞은 편에 행복하게 세개의 치즈 피자를 토마토 스프에 찍어 먹으며 가든 샐러드를 먹고 닥터 페퍼 한 모금을 마시며 앉아있습니다.

박물관 밖은 춥고, 비바람이 불었고, 북한 탈북자는 그가 원할 때 언제든지 그의 집이 있는 남한의 수도인 서울에서 워싱턴까지 박물관을 방문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번이 미국 대학살 추모 박물관에 다섯번째 방문이었습니다. 

 “매 순간이 의미 있습니다,” 우리가 나치의 득세 전시를 통과하여 걸었을 때 신씨는 통역사를 통해 말했습니다. “나치 대학살의 유대인 피해자들이 시달린 고통과 제가 본 [북한의] 감옥 수용소내의 고통은 매우 비슷합니다.”

여전히 날씬하고 5-6피트의 키의 신씨의 체형은 14 수용소에 의해 영구적으로 굳어졌습니다.

그의 어깨는 과중된 노동으로 인해 살짝 굽었고; 그의 등과 뒤쪽의 피부는 지하 수용소에 있는 불로 인한 고문으로 부터 상처가 났습니다; 그의 치골부위의 피부에는 목탄 불을 지기위해 사용된 철고리로로 부터 난 물집으로 부터 상처가 있습니다; 그의 두 정강이는 전류가 흐르는 울타리로 부터 망가졌고 그의 가운데 손가락의 관절은 잘려 나갔습니다 — 14 수용소 공장에서 재봉틀을 떨어뜨렸다는 이유로 그가 받은 처벌입니다. 

워싱턴 D.C.에 위치한 미국 대학살 추모 박물관에서 신동혁 씨. 사진:Jared Sichel

박물관에서 신씨는 빨간색 스웨터, 파랑색 스키니 진, 검은색 아베크롬비&피치 비옷과 밝은 색의 운동화를 신었습니다. 윤이 나는 안경과 곧고 긴 검은 색 머리, 그리고 앞머리, 그는 서양 또는 적어도 남한의 겉모습과 편안해 보였습니다.

과묵하고 겸손한 신씨는 전시관을 걷고 점심 때 모두 그는 그 날 내내 조용하게 말했습니다. 그는 종종 미소를 띄었지만 진지하고,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저와 이야기 할 때 심지어 그는 때때로 무표정을 띄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통역사와 한국어로 이야기 할때는 가끔 그는 빙그레 웃거나 그의 통역사가 즉각적으로 저에게 그가 말한 유머있는 무언가를 통역해 주었습니다.  

그는 현재 서울에 있는 아파트에서 살고 있으나, 신씨는 수업을 듣거나 정규직의 직장은 없습니다; 그는 그의 친구중에는 “14 수용소로부터의 탈출”을 판매하며 편안히 살기 위해 심지어 충분한 돈을 버는 친구 들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한 북한 내에 정규직 직장으로 키우고자 하는 비영리 단체를 설립했습니다.  

신씨의 통역사는 신씨가 그의 연설과 등장에 관한 어떠한 돈도 받기를 거부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기관들이 돈을 지불하고 싶어할 때에는, 가끔씩 그 돈은 북한 내로 곧장 들어 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박물관에서 신씨는 1945년 수 천명의 부패하고 있는 시체가 해방된 나치 강제 수용소로부터 불도저로 땅을 파헤치고 있는 끔찍한 사진들을 발견했습니다.

남한에서 처음으로 그가 본 그 사진의 공포는 그를 그가 반드시 오늘날 북한의 네 강제 수용소의 수감자의 역경에 대한 쇠약해 지고 있는 의식을 높이는데 그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겠다고 그를 설득했습니다. 신씨는, 그의 비공개로 남고 싶은 바램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전체주의 정부와 북한 국민들의 끊임없는 정치적 투옥에 관해 빛을 내뿜게 하기 위해 자라나고 있는 움직임에 대해 대중적인 얼굴이 되었습니다,

북한의 국제적인 매스컴 보도는 북한의 인도주의적인 비극을 제외한 모든 것에 초점을 두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북한의 핵 프로그램 또는 전 미국 농구 스타 데니스 로맨과 북한의 31살의 독재자 김정은의 싹트는 우정 또는 예전 최근 김씨의 서열 두 번째 사람인 최근 마지막에 처형한 그의 삼촌, 장성택에 관해 듣습니다.

그러나 신씨는 완전히 숨어 있는 인구에게 이뤄지고 있는 것에 대한 관심이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살아 있는 증거입니다: 1945년 1월 27일, 소비에트 무력으로부터 아우슈비츠의 해방이 거의 70년 이 지난 후, 북한의 강제 수용소는 현재 나치 수용소보다 12배 더 길고 구소련의 교정 노동 수용소 관리국보다 두 배는 길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감춰진 수용소”의 저자 David Hawk에 따르면, 수용소는 25백만명보다 낮은 인구수를 가진 북한에서 80,000과 120,000명 사이의 북한 정치범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 즉, 위헌법률심사권없이 임의적인 “범죄”로 노예 수용소에서 고생하는 150만명의 미국인과 비례하여 동등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수용소에 감금된 북한사람들의 수를 200,000명이라 추정하지만, 확실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아가, 북한 정부에 의해 설립된 감옥과 고문 네트워크가 나치의 수용소의 전멸이 아닌 끊임없는 스탈린의 강제 노동 수용소의 구금과 고된 노동을 본떠 만든것이라고 하지만, 신씨는 언젠가 북한 정권이 히틀러의 각본을 가지고 그들의 수감자들을 처형하기 시작할 것이라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고 이습니다.

 

 “북한 강제 노동 수용소의 수감자들의 운명— 그들은 죽음에 이르기 까지 태워지고, 가스에 취하고, 총에 맞습니다.” 신씨가 우리의 대학살 박물관에 방문을 하는동안 말했습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운명, 그것이 나를 두려움에 가득차게 합니다.”

북한의 태동강위에 있는 14 수용소의 구글 위성 지도

노예 태생

북한의 기준을 제외하고는 신씨는 죄를 저지른 적이 없습니다. 그는 1982년 11월 “정치적 사범”들 위한 강제 노동 수용소, 관리소라 불리우는14 수용소에서 태어 났습니다.

신씨가 그의 아버지의 삼촌이 한국 전쟁 (1950-1953) 당시 남한으로 도망 간 두 삼촌을 가진 아버지의 아들이란 이유로 범죄를 저질렀다 하여 거기 있었습니다. 독재적인 명령에 의하여, 그것은 3대에 걸쳐 그 삼촌의 친척들은 수감되어야 하고, 대중으로부터 격리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그는 그의 어머니, 장혜경씨에게 어떻게 그녀가 수용소로 오게 되었는지를 절대 묻지 않았고 — 그의 어머니도 그에게 그 이유를 절대 말하지 않았습니다. 

대학살 이전 삶이 있었던 유럽의 유대인 가족들과는 다르게, 신씨는 오직 14수용소만 알았습니다. 그만의 설명에 따르면, 그는 완전한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Harden에 따르면, 그 수용소는 30마일 길이 그리고 15마일의 너비의 대략 로스앤젤레스 도시만하다고 합니다. 그의 집은 네 가족과 공유하는 일층 건물이었고, 신씨와 그의 어머니가 한방을 가졌고 매일 밤 서로의 옆에서 콘크리트 바닥에서 잤습니다.

14 수용소의 가족들은 하루에 오직 2시간 동안의 전기를 가집니다 — 오전 4시부터 5시 그리고 오후 10시부터 11시. 거기에 침대, 테이블, 의자 또는 흐르는 물은 없습니다. 그들은 공용 변소를 사용하고, 그 배설물들은 수용소 농장을 위해 거름으로 사용됩니다.

신씨의 식단은 23년 동안 하루에 2번, 옥수수 죽, 김치, 그리고 배추국이었습니다. 정치경찰, 보위부가 처벌로서 음식을 철회하지 않는 것을 빼고 예외는 없었습니다.

그는 농부, 건설인부, 수리공으로서 굶주렸고 과로했고, 오직 최소한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의 원시사회 인생은 생존을 조금 벗어나 그에게 거의 가르친게 없습니다. 신씨는 사랑, 연민 또는 도덕성에 대한 개념이 없었습니다.

그의 엄마는 그의 후견인이 아니었습니다 — 그녀는 음식을 위한 경쟁이었습니다. 장씨에게 신씨는 사랑받아야 하거나 보살펴야 할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생존에 대한 장애물이었습니다.

Harden이 적었듯이, 신씨는 종종 그의 엄마의 식사를 먹곤 했습니다; 이것은 그의 엄마를 배고프게하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어렸을 때, 그는 그의 엄마가 밭에서 일하고 있었을 때 방 주위를 뒤지곤 했습니다. 만약 그녀가 집에 돌아와 음식이 사라진 것을 알아차리면, 그녀는 신씨를 괭이나 삽으로 종종 심하게 때렸습니다. 

신씨는 희근이라고 하는 한 명의 형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신씨는 그를 거의 알지 못했습니다. 신씨가 4살때, 희근씨는 그 집을 나갔습니다  — 이것은 12살에 의무이고 그의 작업장에서 가까운 기숙사에 들어갔습니다. 신씨는 또한 신경섭이라는 수용소에 사는 아버지가 있었는데 그는 거의 그를 알지 못했습니다. 

신씨의 부모들은 보위부에 의해 주선된 “결혼”을 했습니다 — 그의 아버지에게 “수용소의 기계 수리소의 금속 선반 가동에 대한 능력”의 보상으로서라고 Harden이 적었습니다.

일년에 다섯 밤 그가 그의 아내와 시간을 보낼 수 있을 때를 제외하고, 신씨의 아버지는 기계 수리소에 있는 기숙사에서 살았습니다.

나치와 수련 노예 수용소에서 사실이었던것처럼, 북한의 상황 또한 여성 수감자들을 강간하고 종종 성관계를 음식을 더 얻거나 처벌을 적게 받는 당근으로서 이용하는 감시요원에 의한 학대가 만연합니다. 물론, 여성들은 저항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어느 날 그가 10살 때, 신씨는 그의 어머니를 찾으러 갔습니다. 그는 배가 고팠습니다. 그는 창문을 통해 그의 어머니가 청소를 하는 감시요원의 사무실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습니다. 감시요원이 장씨에게 다가가 “더듬기 시작했습니다.” 신씨는 그들이 성관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그의 어머니에게 그가 보았던 것에 대해 절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장씨는 운이 좋게도, 임신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 임신이 감시 요원에 의한 원치 않는 임신이라면 배가 불러오는 여성들은 14수용소에서 사라지는 요령이 있었습니다.

수용소 체계의 감시 요원이었던 안명철 탈북자는 Harden에게 말했습니다. “그는 개인적으로계획되지 않은 신생아들이수용소 감시 요원에 의해철 회초리로 얻어 맞는 것을 본적이 있다”.

 

14 수용소의 ‘교육’

14 수용소의 신씨의 학교 교사들은 늘 권총을 소지하고 다녔던 획일화된 감시요원들이었습니다. 신씨는 칠판 지시봉으로 6살짜리 급우가 죽을때까지 맞는 것을 보았습니다. 일러스트레이션: 신동혁/ 북한 인권 예우 데이터베이스 센터

어느 날, 신씨가 6살 시절, 그가 교실에 앉아 있었을때 그의 교사가 교실의 모든 40명의 학생의 주머니를 뒤지며 “깜짝 수색 조사”를 하였습니다. 학생들에 의해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그 교사는 신씨가 말한 것에 의하면 5개의 옥수수 낱알을 찾았고, 이는 모두 여자 급우들이 소지한 것이었습니다.

교실 앞에서 그 소녀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명령하며, 그 교사는 반복하여 그녀의 머리를 칠판 지시봉으로 찍어 내렸습니다. 반복된 내리침 후에, 그녀의 두골위에 덩어리가 부어올랐고, 그녀의 머리에서 피가 쏟아져 내렸고 그녀는 쓰러져 무의식이 되었습니다. 그날 이후, 그녀는 죽었습니다. 그 다음날, 교사는 교실 앞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것은 신씨가 목격한 첫 살인이 아니지만, 그것은 첫번째 비공식 살인 이었습니다. 매년 14 수용소 수감자들이 봐야만 하는 연중 둘 또는 셋의 처형이외에, 보위부는 마음대로 처벌을 줄 수 있습니다.

북한의 나머지 학생들과는 다르게, 수감자들은 김씨 정권만의 신과 같은 자비에 의해 고안된 세뇌를 당하지 않습니다. 그것보다, 그들은 거의 배우지 않습니다.  

신씨는 수용소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의도적으로 계속해서 무지상태로 있게 된다고 믿습니다. 외부에서 북한 사회, 또는 아마 심지어 중국 또는 남한에 대해 무언가를 알고 데려와진 아이 수감자를 위한 수업은 다른 곳에서 이루어 집니다.

밀고자

신씨가 13살 때, 부엌을 통해 신씨는 그의 어머니와 형이 하는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를 정신 차리게 하는 했던 한 단어— 탈출. 희근은 보아하니 그의 작업장을 허락없이 떠났고, 그는 만약 그가 복귀한다면 처벌을 받을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신씨는 그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 지었습니다.

 “탈출을 시도하는 자의 보고를 하지 않은 어느 목격자든 즉시 총살 당할 것이다”라는 규칙을 아는 신씨의 “수감소가 낳은 본능을 떠안았습니다”, 라고 Harden이 말했습니다.

집에서 뛰쳐나와 학교의 야간 감시요원을 찾아, 신씨는 정확히 그가 길러지며 하라고 배운 것을 했습니다 — 그는 그가 우연히 들은 것을 설명하며 그 자신의 어머니와 형을 밀고 했습니다. 그 날, 그는 집이 아닌 기숙사에서 잤습니다.

다음 날, 감시요원들이 운동장에 있는 신씨를 찾아 왔습니다. 수갑을 찼고, 눈을 가리고, 차로 밀어 넣고, 14 수용소의 지하에 있는 감옥에 넣었습니다. 그는 왜 그가 밀고자로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 건지 혼란스러웠습니다.

결국, 그는 그 날 감시요원들이 그의 가족의 탈출 계획을 저지하는 것에 대한 공을 모두 가로 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그의 어머니와 형 둘 모두 잡혔습니다.

 

탈출을 시도한 자의 아들을 믿을 수 없었던 감시 요원들은 신씨를 지하 감옥에 8개월 동안 수감하였고, 초기에는 그를 잔인한 고문을 하였고 친절하고 늙은 남자와 공유하는 어두운 방에 단지 생존 할 수 있을 정도의 맛없는 음식만 먹였습니다.  

그의 어머니와 형의 탈출 계획을 발견 한 후 , 신씨는 14 수용소 내의 비밀 지하 감옥에서 7개월 동안 갇혀 있었습니다. 그는 13살 이었습니다.

11월 말, 그의 석방에 따라, 감시 요원들은 그에게 지하 감옥에 관해 말하는 것에 대한 금지 동의서에 도장을 찍게 했습니다. 다시, 그는 수갑이 채워졌고 눈이 가려졌으며, 그 후 그의 어렸을적 집에 가까운 밭으로 옮겨졌습니다 — 그가 몇몇 연중 처형을 가장 많이 목격한 곳과 같은 곳의 밭이었습니다. 

감시 요원이 그의 수갑과 안대를 제거하고 그를 앉혔습니다. 그 후, 그의 어머니와 형은 끌려나와 교수대와 땅에 나무로 만들어진 막대기로 이끌렸습니다. 장혜경은 그녀의 아들의 시선을 끌려 했지만, 그는 보기를 거절했습니다. 그녀의 어머니가 매달아 졌을때, 그 순간 그는 그 탈출 계획과 함께 그의 삶을 위험에 빠뜨린것에 대해 그녀가 죽음을 당할만 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무로 된 막대에 묶여진 그의 형이 다음 차례였습니다: 각각 세 명의 감시 요원은 그를 즉시 죽이며 세 발을 쐈습니다. 신씨는 형 또한 죽음을 당해 마땅하다고 느꼈습니다.

신씨가 장씨와 그의 형에 대한 처형에 대한 이야기를 Harden과 처음 나눴을 때, 그는 그들을 고발했다는 부분은 배제했습니다. 그러나 자유속에 살고, 정직과 같은 기본적인 가치를 배우면서 이는 그를 “보다 더 도덕적이고 싶다”라는 마음을 갖게 했고, 이는 그를 죄책감을 느끼게 했다고 Harden이 말했습니다.

 “저는 제 가족보다 감시 요원들에게 더 충실했어요.” 신씨가 말했다. “우리는 서로의 스파이 였어요. 제가 진실을 말함에 따라, 사람들이 저를 얕볼 것이란 것을 압니다.”

 ‘히틀러의 조언’

 “아마 김일성은 히틀러 그 자신의 조언을 받아 들였을 것이다,” 신씨가 나치의 권세 전시를 공부하며 궁금해 했습니다.

만약 북한의 독재자들, 그들의 가족들 그리고 그들의 하인들 중 누군가가 20세기의 가장 악명높은 악인들을 연구한다면, 놀랄 것이 없습니다.

전시 후에, 신씨는 14수용소가 얼마나 나치의 강제 수용소와 비슷했는지 묘사했습니다 — 모욕감, 폭력, 허기짐, 인간의 존엄성의 완전한 결핍.

14 수용소에서, 그는 말해습니다, “시체들이 버려지는 특별 장소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파진 묘지가 너무 얕았습니다,” 신씨가 말했습니다. “비가 오면, 시체들이 땅 밖으로 나왔습니다.”

베를린의 거리에서 정통 유대인에게 모욕감을 주는 독일인들의 사진을 보며, 신씨는 14수감소에서, 수감요원의 아이들이 종종 신씨와 그의 수감자 동료들을 조롱하고 돌을 던졌다고 말했습니다.

때때로, 신씨는 말합니다, “수감 요원들은 수감자들의 옷을 벗기고 그들을 조롱했습니다.”

나치와 다르게, 그러나, 북한 정부는 대량 살상의 정책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 신씨는 기아, 고문, 그리고 노예 노동의 조합은 오래 계속된 사형선고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나치와 대응하는 것처럼, 북한 정부는 때때로 특정 화학물의 효능을 실험하기 위해 수감자들을 실험실의 쥐처럼 이용합니다. 신씨는 수감요원들이 15명의 수감자들에게 그들 스스로를 문질러 바르기 위해 화학적 용해를 주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 후 얼마 안되어 그들은 부스럼을 개발하였습니다.

Harden이 적었듯이, “신씨는 공장에 도착한 트럭을 보았고, 거기에 병에 걸린 수감자들을 싣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이 후에 그들을 두번 다시 볼 수 없었습니다.”

구제위원 신문에 따르면, 함양에 있는 22 수감소의 수감자들과 수감 요원들은 “전체 가족들이 유리방안에 갇혀 가스 질식하는 것을 본다고 묘사”되어있습니다.

22 수감소 경영의 지도자, 권혁은 구제위원에 말했습니다. “보통, 가족은 같이 뭉쳐있고 개인 수감자들은 모퉁이에 각각 서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전체 과정을 위에서 유리를 통해 관찰합니다.”

한 탈북자에 의해 밀수된 한 공식 문서에 따르면 39살의 인훈나가 “액체 가스 화학무기의 인간 실험 대상 목적을 위해” 22 수용소로 이송되었다고 합니다. 

지하 감옥에서, 감시 요원들은 그의 어머니와 형의 계획된 탈출에서 신씨의 역할을 찾아 내기 위해 그를 석탄 위에서 고문했습니다. .

2004년, Simon Wiesenthal Center의 협회 학장인 Rabbi Abraham Cooper는 이러한 실험에 참가당한 것을 주장하는3명의 탈북자를 만나기 위해 서울로 갔습니다.   

Cooper는 미국 북한내 인권 보장 위원회의 이사회 위원이고 최근 Rodman의 북한과의 수치스럽고 압력이 가해지는 “농구 외교”와 관련해 활동적으로 일해왔습니다.

 “저는 절대 두 번째 탈북자가 부모들과 그들의 아이들의 유리에 둘러쌓여진 방에서의 서서히 오는 죽음을 지도한 것에 대한 묘사를 하는 그의 고통을 잊을 수 없을것입니다, “Cooper는 12월 이 신문의 사설란에 적었습니다. “얼마나 그 고통이 가해졌고 그 운없는 부모들이 숨쉬기 위해 공기를 그들의 죽어가는 아이들의 폐에 주입하는 충격적인 세부사항이 절차에 따라 적혔고 분석을 위해 북한의 독가스 제품과 제품 향상을 맡은 사람들에게 전해졌습니다.”    

대학살 박물관에서, 구역에서 구역으로 천천히 지나며, 신씨는 동료 유대인을 감독하기 위해 독일인이 할당한 유대인 수감자들인, 상세한 나치의 카포 사용 전시관에 이끌렸습니다.

나치 감시 요원은, 유대인에게 주어진 상대적인 힘을 가진 신분은 효율성만을 위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서로를 반하게 되었습니다, 카포는 독일의 감시요원만큼 악랄했습니다 — 14 수용소에서 신씨가 본 채택된 전략이었습니다. 

 “특정 감옥 숙마자들은 그 감옥 수감자들의 구역 지도자 입니다,” 그 수용소의 계층구조에 대해 설명하며 신씨가 말했습니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 또는 그 수용소 감시요원들의 명령하에 다른 수감자들을 통제했습니다.”

처형의 순간의 폴란드 유대인 얼굴의 이미지를 관찰하며, 신씨는 그가 말한 “저항의 얼굴”에 경외감을 느꼈습니다.

그는 14 수용소에서 공개처형 이전에 필연적인 결과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감시 요원들은 그들이 그들의 마지막 순간에 어떠한 저항도 할 수 없게 그 또는 그녀의 입에 자갈을 채워넣고, 수감자들을 때리고 고문하곤 합니다.

신씨는 북한의 위기에 관해 아는 묘책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알고 그를 실망시키는 것은 히틀러, 스탈린, 마오, 그리고 포트가 수행한 비슷한 정치적 학대와 대량 수감을 가능하게 한 같은 종류의 무관심이 21세기의 노동 강제 수용소에 보이는 전 세계의 무지와 무관심이 다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수감자들을 구하기 위해 이 지역을 폭발 시킬 기회가 있었습니다,” 미국이 공격하기를 거절한 아우 슈비츠에 이르는 기찻길의 위성 사진을 가르치며 신씨가 말했습니다.

 “오늘날도 같은 것입니다 — 우리는 구글어쓰를 통해서 보고, 우리는 북한 내에 이 강제수용소가 어디있는지 압니다.”

그러나, Hawk의 저자에 따르면 북한과의 전쟁은 카드에 있지 않습ᇠ Tracker Pixel f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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